나의 아내는 목소리가 참 곱습니다.
젊을 때부터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성우를 해보라는 소리도 종종 듣곤 했고,
저 역시 아내의 고운 노랫소리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.
쉰 줄이 다 된 나이에도 아내의 목소리만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.
장사하랴 애들 키우랴 홀어머니 모시랴 온갖 고생을 하면서 아내의 손은 굳은살이 박이고 늙은 고목나무처럼
거칠어지고 갈라졌지만 아내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참 고왔지요.
그런데, 문제는 얼마 전부터였습니다.
어머니가 지병인 당뇨로 병원에 입원을 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죠.
하루 종일 시장판에서 야채장사를 하고 가게 문을 닫은 저녁이면 병원으로 가 어머니 옆에서 새우잠을 자곤 하던 아내는
쉬는 날이면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지기가 일쑤였는데, 얼마 전부터는 어머니가 잠든 늦은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는
아이들 방에 건너가 새벽까지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.
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. 내가 쉴만한…”
처음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어 그런가보다 했습니다.
그런데, 한 달이 다 되도록 작은 아이가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주말을 빼고는 매일 밤 계속되는
아내의 성경읽기는 끝날 줄을 모르더군요.
“여보, 그러다 몸 상하겠어. 온종일 장사하고 어머니 돌봐드리고,
밤에는 잠도 안자고 성경만 읽고 있으면 몸이 견뎌나겠어? 오늘은 좀 쉬지 그래?”
아내가 걱정되어 하루라도 쉬라고 만류하려 해도 아내는 오늘은 요한복음은 꼭 다 읽어야 한다며
작은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습니다.
아내의 노곤함이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.
결혼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일을 하면서도 아이들 키우랴, 홀어머니 모시랴 몸 고생 맘고생이
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지요. 더욱이 올해는 군에서 제대하는 큰아이 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해야 하는데,
어머니마저 병원에 누워계시니 안 그래도 꽁꽁 졸라맸던 허리띠를 한 뼘은 더 줄여야 할 터였으니까요.
하지만,
“여보, 나 지금부터 성경 읽을 거니까 조용히 좀 해줘요. 당신도 책을 읽던지, 피곤하면 먼저 자구요.”
하면서 한번 들어가면 문까지 걸어 잠그고는 마루에서 TV소리조차 크게 켜지 못하게 하는데,
그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니 은근히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더군요.
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주말에 작은 아이가 기숙사에서 돌아와도 거실로 내 몰고는 식사만 달랑 차려놓고는
방에 들어가 성경만 읽는 것이었지요.
모처럼 집에 쉬러 온 작은 아이의 불만도 꽤나 높았습니다.
결국 참다못한 저는 아내에게 괜한 트집을 잡으며 한 마디를 하고 말았습니다.
“당신, 요즘 너무 어머니에게 소홀한 거 아냐? 하루 종일 어머니가 병원에서 혼자서 얼마나 적적하시겠어.
그런데 저녁에 겨우 찾아가 얼굴만 비추고… 성경 읽을 시간 있으면 어머니를 더 잘 돌봐…”
아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, 또다시 작은 방으로 들어가고 말더군요.
그날도 아내의 성경읽기는 계속되었습니다.
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. 아내에게 한바탕 쏘아붙이고 난 터라 기분도 그렇고 해서 아침밥도 거른 채
서둘러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.
“아침 안 먹어요?”
등 뒤에서 묻는 아내의 물음에도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았습니다.
“여보, 오늘 7시까지 병원으로 오세요. 어머니 생신인 거 잊지 않았죠?”
순간 ‘아차’싶었습니다. 뭣에 쫓기고 사는지 어머니 생신인 거조차 잊고 있었던 거지요.
그날 저녁, 퇴근 후 서둘러 병원으로 갔습니다.
아내는 먼저 와서 떡이며 케익이며 음식들을 준비해 놓고 있더군요. 그러더니 아내는 어머니에게 예쁘게
포장된 작은 상자까지 내미는 게 아니겠어요.
“어머니, 생신 축하드려요. 그리고 이건 생신선물이에요.”
“에이구 돈도 없을 텐데 뭔 선물까지 사와! 늙은이가 뭐 필요한 게 있다구.”
“풀어보세요. 돈 안 드는 선물이에요.”
반짝이는 포장지를 풀어내자 작은 상자에는 스무 개 남짓한 테이프들이 가지런히 꽂혀져 있었습니다.
“어머니 낮에 적적하실 거 같아서요. 어머니 예전부터 성경말씀 테이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.
낮에 적적하실 텐데 들으시라구요.”
순간,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… 아내는 그동안 매일 밤마다 아이들이 쓰던 영어테이프에 어머니에게 드릴
성경말씀을 녹음하고 있었던 겁니다. 두 달여 사이에 아내는 신약과 시편까지 녹음해 놓았더군요.
아, 이 철없는 남편! 그것도 모르고 불평하고, 트집 잡고 어제는 화까지 내고 말았으니! 하루만 더 참을 것을.
하지만 이 무뚝뚝한 남편은 머쓱해진 마음에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을 고작 이렇게 한 마디 던지고 말았습니다.
“성경말씀 테이프 사면되지… 컴퓨터에서 다운 받아도 되고…
그것 때문에 그렇게 며칠 동안 밤 새워가면서 녹음을 한 거야?”
“알아요. 나도. 그래도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제일 좋아하시잖아요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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